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(문단 편집) == 가족 관계 == * 대복진/정복진 경효충공정궁원비 보르지기트씨(敬孝忠恭正宮元妃 博爾濟吉特氏, 1611년 ~ 1649년) - 시호는 경효충공의황후(敬孝忠恭義皇后).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문황후의 사촌언니. * [[의순공주|대복진 이씨]](大福晉 李氏, 1635년 ~ 1662년) * 계복진 퉁기야씨(繼福晉 佟佳氏) - 상서 몽아도(蒙阿圖)의 딸 *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- 이름 찰이망(紮爾莽). 찰로특부 태길 근두이(紮魯特部 台吉 根杜爾)의 딸. *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- 호르친 태길 납포희서(拉布希西)의 딸 * 계복진 보르지기트씨 - 호르친 태길 색낙포(索諾布)의 딸, 숙친왕 호오거의 적복진. * 측복진 궁기트씨(側福晉 公齊特氏): 차하르 태길 포연도(布延圖)의 딸 * 측복진 보르지기트씨: 태길 두사갈이탁농(杜思噶爾卓農)의 딸 * 측복진 기이모트씨(側福晉 濟爾莫特氏) : 방도무(幇圖武)의 딸 * 측복진 이씨(側福晉 李氏) - 조선 여인, 이세서(李世緖)의 딸. * 동아격격(東莪格格) * 오이고예(吳爾庫霓) : 호르친친왕 오극선(吳克善)의 노비, 도르곤 사후 순장. 도르곤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 예친왕 도도의 5남인 예친왕 도르보(睿親王 多爾博, 1643년 ~ 1673년)를 양자로 들였다. 한편 도르곤의 자식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. 도르곤은 초혼을 한 뒤부터 25년간 십수명 이상의 여자를 처첩으로 들였음에도 아들은 커녕 딸조차 전혀 낳지 못했고, 죽기 직전에야 한족도 만주족도 몽골족도 아닌 '조선인' 측복진으로부터 겨우 딸 하나만 낳았을 뿐이였다. 이에 대해 혹시 도르곤의 사후 숙청 과정에서 도르곤 일가에 대한 조직적인 [[기록말살형]]이 이뤄진건 아닌가 하는 의문점으로 다가온다. 그러나 도르곤이랑 친하게 지냈던 [[소현세자]]가 볼모로 지내던 시절의 기록인 심양일기에도 도르곤의 '(장성한) 자식'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고, 황실 족보를 털어보며 도르곤을 예충친왕으로 복권한 건륭제조차 도르곤의 후손은 찾아내지 못하고 양자 도르보의 후손에게 작위를 주는데에 그쳤다. 그냥 자식 복이 지지리도 없었거나, 도르곤 본인이 심각한 [[난임]]이었을 확률이 더 높다.[* 사실 청나라는 황족 및 외척이라면 정치적 풍파에 휘말리거나 크고 작은 사고를 쳐도 후손까지 '멸족'당하는 예는 [[오삼계]]급의 대역죄인이 아니고서는 의외로 드물었다. 당장 누르하치 대에도 누르하치는 장남 추연이나 동생 슈르하치를 숙청했지만 후예들은 보전하여 철모자왕 작위와 함께 오래오래 대가 이어졌고(추연의 종갓집은 심지어 옹정 연간 황8자당+천주교 입교 콤보의 [[사망 플래그]]가 떠서 순교자가 줄을 이었음에도 끝끝내 멸족만은 면했다!), 도르곤에게 숙청당한 호오거의 후손들도 역시 철모자왕 작위가 이어져 청나라 복벽운동의 주요 리더로서 족적을 남겼으며, [[니오후루 허션]] 역시 건륭제가 세상을 떠난 후 추포되었으나 건륭제의 딸이였던 며느리의 읍소 덕에 자신만 자결하는 선에서 자손은 보전할 수 있었다. 또한 [[강희제]] 시기의 황위 쟁탈전에서 [[옹정제]]와 대립한 황8자 염친왕 윤사나 윤사의 동생 윤당 역시 거의 기록말살형에 처할 정도였지만(실제로 이 둘은 만주어로 개, 돼지를 의미하는 새사흑, 아기나로 개명당했다. 그리고 윤사의 아들인 홍왕과 윤당의 아들등 역시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. ) 어떻게 후손은 남았고 [[건륭제]] 때 다시 황실 족보에 올라 지위는 낮지만 황족으로 대접받는다. 또한 도르곤과 대립한 [[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]]의 7대손인 정친왕 단화와 [[이혁보국군왕 숙순]], [[이혁이친왕 재원]]역시 [[기상정변]] 당시 [[공친왕]]과 [[자희태후]]에게 정적으로 몰리지만 재원과 단화는 자결하고 작위는 불입팔분보국공으로 강등되는 수준으로 끝난다. [[연갱요|오라버니]]가 죽게 생기자 앓아누운 연귀비에 대해 "연귀비 죽으면 황귀비급으로 장사지내라"고 연귀비가 죽기도 전에(...) 지시할 정도로 무자비했던 숙청의 황제 [[옹정제]]가 연갱요의 죄를 장자에게만 연좌시켜 아비 따라 저승에 보냈을 뿐, 다른 아들들과 일가족에 대해서는 양황기한군 기적을 말소하고 변방 오지로 쫓아내는 선에서 숙청 작업을 마무리지었던 일이 그나마 청 황제들의 외척 숙청시 가장 '멸족'에 가까웠던 예이다. 그런걸 보면, 도르곤의 장성한 아들들은 모조리 숙청당하고 기록말살까지 당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없었을 가능성도 높다.] 한편 2005년엔 뜬금없이 광저우에 사는 어떤 남성이 갑툭튀하여 자신의 선조가 도르곤의 아들인데 도르곤의 사후 숙청 당시 정백기의 도움으로 숙청 당시 자금성을 탈출하여 중국 남쪽 끝 광동성까지 도망쳐서는 곤(袞)자와 비슷한 원(袁)씨 성의 한족으로 신분 세탁을 하고 숨어 살아왔다면서[* 청나라 멸망 이후가 아니라 청나라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 만주족이 한족으로 신분 세탁을 했다면 주로 그 만주족이 속한 가문이 [[문자의 옥]]으로 몰락했던 경우다.] 자신은 도르곤에게는 10세손이 된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으나 만주사학계나 청조 종친들에게나 인정받지 못했다. 이 떡밥은 중문 위키백과에 소개되어 있고 영어 위키백과에도 이 일화가 소개되어 있으나, 기사도 쉬이 찾아볼 수 없고 학자들에게도 헛소리 취급을 당하며 잊혀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